
이봉주 선수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세히 안 건 아니고 그저 우리나라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였다는 정도만 알았죠. 러닝을 시작하고 나서 한국 마라톤 역사를 찾아보다가 이봉주가 세운 2시간 7분 20초라는 기록이 2000년에 세워진 뒤 26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달리기를 놓지 않고, 건강회복 후 5km를 달린 영상을 보고 극심한 부상에서 회복해 다시 달리는 모습에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이봉주 선수의 애틀랜타 은메달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 결승선. 이봉주 선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선수에게 단 3초 뒤진 채 골인했습니다. 이 순간, 그는 1위 선수와 손을 잡고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함께 돌았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 언론과 국민들은 은메달을 아쉬운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금메달을 놓친 선수들은 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떨구며 석고대죄하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봉주는 달랐습니다. 금메달을 놓치고도 환하게 웃으며 1위 선수를 축하했고, 그 모습은 한국 스포츠 문화에서 은메달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음 날 중앙 일간지들은 이봉주의 은메달 소식을 1면에 대서특필했고, 이는 한국 올림픽 역사상 은메달로 1면을 장식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이야기를 알기 전까지 은메달이 그저 2등이라는 의미로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마라톤이라는 종목이 갖는 상징성, 손기정과 황영조로 이어지는 한국 마라톤의 역사, 그리고 단 3초라는 근소한 차이가 만들어낸 서사는 단순한 메달 색깔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평발에 짝발이라는 신체적 불리함을 안고도 그러한 기록을 세웠다는 점은 더욱 인상 깊었습니다. 평발이란 발바닥 안쪽 아치가 거의 없이 발 전체가 지면에 닿는 발 형태로, 러닝 시 충격 흡수 능력이 떨어지고 발목과 무릎에 과부하가 걸리기 쉬워 부상 위험이 높습니다. 짝발이란 양발의 크기나 형태가 다른 상태를 말하며, 좌우 밸런스가 달라 러닝 자세가 비대칭이 되기 쉽고 특정 부위에 무리가 집중될 수 있습니다. 이봉주 선수는 신체적 불리함까지 이겨낸 진정한 마라토너인 것이죠.
26년째 깨지지 않는 한국 마라톤 기록
2000년 2월 도쿄 국제 마라톤에서 이봉주는 2시간 7분 20초를 기록하며 한국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한국 최고 기록이란 특정 종목에서 한국 선수가 공식 대회에서 달성한 가장 뛰어난 기록으로, 국내 선수들의 경기력 수준을 나타내는 기준이자 후배 선수들이 넘어야 할 목표가 됩니다. 2026년 현재 이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온갖 기술이 집약된 카본 러닝화가 보급된 지금, 2시간 7분대가 세계 기준으로는 550~600위권 기록이 됐지만 한국 선수 중 누구도 이 벽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카본 러닝화란 신발 밑창 내부에 탄소섬유(카본) 소재의 플레이트가 삽입된 고성능 레이싱화로, 착지 시 지면 반발력을 극대화해 추진력을 높이고 에너지 손실을 줄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201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해 세계 마라톤 기록이 잇달아 단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01년 보스턴 마라톤에서는 시드니 올림픽 챔피언 게자네 아베레를 꺾고 우승했습니다. 보스턴 마라톤은 1897년부터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라톤 대회로, 뉴욕, 런던, 베를린, 시카고, 도쿄와 함께 세계 6대 메이저 마라톤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곳에서의 우승은 마라토너로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것을 의미하며, 1947년 서윤복, 1950년 함기용 이후 51년 만의 한국인 우승이었습니다. 2007년 서울 마라톤에서는 만 36세의 나이에 2시간 8분 4초를 기록하며 우승했는데, 이는 자신의 한국 기록과 겨우 44초 차이였습니다. 이때 나이는 지금의 제 나이와도 비슷한데, 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평발과 짝발도 아니고 카본화도 있습니다. 부끄럽기도 하면서 이봉주 선수가 실로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건강회복 후의 이야기
은퇴 후에는 복벽 이상운동증이라는 희귀 질환으로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고통받았습니다. 복벽 이상운동증이란 복부 근육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비정상적으로 수축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신경계 희귀 질환으로, 극심한 통증과 함께 보행과 일상생활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허리가 심하게 굽고 배에 보톡스를 맞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했던 시기도 있었죠. 하지만 낭종 수술 후 꾸준한 재활을 거쳐 2024년에는 러닝머신 위에서 경보를 하고, 2025년에는 5km를 달리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재활이란 부상이나 질환으로 손상된 신체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체계적인 운동 치료와 물리치료를 반복하는 과정으로, 단순한 휴식과 달리 점진적인 부하를 통해 기능을 되살리는 능동적인 회복 방식입니다. 제가 부상 후 러닝을 재개하면서 느낀 건, 다시 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였습니다. 혹시라도 다시 예전처럼 달릴 수 없게 될까 봐 불안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했었습니다. 때로는 그냥 달리기를 포기하고 싶기도 했었습니다. 이봉주의 재활 과정은 저 같은 일반 러너에게 단순한 유명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 자체로 다가왔습니다. 평발과 짝발이라는 불리함을 극복하고 26년째 깨지지 않는 기록을 세운 이봉주.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달리기를 사랑하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봉주가 극심한 통증에서 벗어나 다시 달리는 모습을 보며, 저도 천천히라도 계속 나아가야겠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