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러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마라톤 대회에 참가 자격 제한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습니다. 보스턴, 시카고, 뉴욕. 미국 3대 마라톤은 각각 자격 조건, 코스 특성, 규모 면에서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42.195km를 완주하는 것을 넘어, 각 대회가 상징하는 의미가 러너들의 장기 버킷리스트에 오르는 이유를 제 주관을 섞어서 풀어봅니다.

미국 3대 마라톤 그 첫 번째: 보스턴
보스턴 마라톤은 1897년부터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례 마라톤 대회로, 세계 6대 메이저 마라톤인 월드 마라톤 메이저스(World Marathon Majors) 중 하나입니다. 월드 마라톤 메이저스란 보스턴, 뉴욕, 시카고, 런던, 베를린, 도쿄, 시드니 마라톤을 묶어 부르는 세계 최상위 마라톤 대회 시리즈로, 세계 각지의 엘리트 선수와 아마추어 러너 모두가 가장 도전하고 싶어 하는 대회들입니다. 매년 4월 셋째 주 월요일 패트리어트 데이에 열리는 이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참가 자격 기준이 까다롭다는 점입니다. 패트리어트 데이란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을 기념하는 매사추세츠주의 공휴일로, 보스턴 마라톤은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18세에서 34세 남성은 3시간 이내, 여성은 3시간 30분 이내 기록이 있어야 출전할 수 있고,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기준이 조금씩 완화됩니다. 저는 현재 페이스로는 보스턴 참가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지만, 이 자격 조건이 오히려 훈련을 지속하는 강력한 동기가 됐습니다. 저한테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라 실력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참가 조건이 단순한 완주 이상의 성취로 느껴졌습니다. 2001년 이봉주 선수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했다는 역사를 알고 나서는 하트브레이크 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하트브레이크 힐이란 보스턴 마라톤 코스 30km 지점부터 시작되는 연속 언덕 구간으로, 체력이 거의 바닥난 후반부에 오르막이 이어져 많은 러너들이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가장 힘든 구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코스는 보스턴 시내까지 이어지며, 약 3만 명의 러너와 50만 명이 넘는 관중이 함께합니다. 언젠간 저도 이 하트브레이크 힐 위에서 관중들의 응원을 받으며 직접 뛰는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두번째: 시카고
시카고 마라톤은 1977년 시작되어 매년 10월 둘째 주 일요일에 열리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 나오는 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탄한 코스와 선선한 가을 날씨라는 조합이 기록 경신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더위를 많이 타서 3월이나 4월보다는 10월이 달리기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보스턴과 달리 시카고는 참가에 기록 제한이 없습니다. 일정 자격을 갖추면 보장된 참가권을 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추첨이나 공식 자선 단체를 통해 참가할 수 있습니다. 자선 단체 참가란 대회 주최 측과 협약을 맺은 비영리 단체에 일정 금액 이상의 기부를 조건으로 참가권을 받는 방식으로, 추첨에 당첨되지 못한 러너들이 많이 활용하는 경로입니다. 요즘 마라톤 대회 인기가 날로 높아져 추첨 방식의 대회는 참가하기 힘든데, 기부도 하고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다니 합리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카본플레이트화를 신고 시카고에서 달리는 조합이 기록 단축을 노리는 러너들에게 황금 공식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카본플레이트화란 신발 밑창 내부에 탄소섬유 플레이트가 삽입된 고성능 레이싱화로, 지면 반발력을 극대화해 같은 에너지로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설계된 신발입니다. 직접 시카고마라톤에 다녀온 친구의 후기로는 평탄한 시카고 코스에서 카본플레이트화를 신고 뛰면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합니다. 저도 친구의 말을 들으니 너무 궁금해졌고, 언젠가 시카고 마라톤도 꼭 참가해보고 싶습니다.
세 번째: 뉴욕
뉴욕 마라톤은 1970년 시작되어 매년 11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마라톤 대회입니다. 뉴욕의 다섯 개 자치구를 모두 관통하는 코스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자치구란 뉴욕시를 구성하는 행정 구역 단위로,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브롱크스, 스태튼 아일랜드 다섯 개로 나뉩니다.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시작해 브루클린, 퀸즈, 브롱크스를 거쳐 맨해튼 센트럴 파크에서 끝나는 구성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다양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매년 약 5만 명 이상의 러너와 200만 명이 넘는 관중이 참여하는 규모는 압도적입니다. 국내 최대 규모인 동아마라톤이 3만 명 수준이라는 걸 생각하면, 5만 명의 러너와 200만 명의 관중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작년 뉴욕에 여행으로 갔을 때, 마라톤 완주 구간인 센트럴 파크를 직접 뛰어봤는데, 길도 완만하고 녹지도 푸르러서 마라톤의 마지막 코스로 최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뉴욕 마라톤만의 특별한 문화도 인상적입니다. 마라톤 다음 날 거리 곳곳에서 완주 메달을 목에 건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대부분의 상점에서 완주자를 위해 음식이나 물품을 무료로 제공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웹툰 작가이자 러너인 기안 84가 뉴욕 마라톤 완주 다음 날 온 거리에서 축하받는 모습을 봤는데, 도시 전체가 마라토너들을 환대하는 문화가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의 춘천마라톤이 닭갈비와 막국수로 지역과의 접점을 만들지만, 뉴욕처럼 도시 전체가 완주자를 응원하고 환호하는 분위기는 역시 뉴욕이구나 생각하게 만듭니다.
미국 3대 마라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제 러닝 인생에 특별한 이정표가 됩니다. 보스턴은 실력으로 증명하는 자격의 가치를, 시카고는 기록 경신의 최적 조건을, 뉴욕은 도시 전체와 함께하는 축제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저는 러닝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이 세 대회가 장기 버킷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저에게는 보스턴 기록 조건을 언젠가 달성하겠다는 목표가 훈련을 지속하는 가장 큰 동기 중 하나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