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잘 달리는 사람보다 힘겹게 완주하는 사람의 모습이 더 눈물겹게 느껴질까요? 최근 시청률 4.6%로 성황리에 종영한 러닝 예능 '극한84'가 그 질문에 답을 줬습니다. 기안84가 극한의 마라톤 환경에서 끝까지 도전하는 과정을 보며 느낀 것들을 솔직하게 풀어봅니다.
극한84가 보여준 평범함
극한84는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가 세계 각지의 극한 마라톤 환경에서 완주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은 러닝 예능 프로그램으로, 최근 시청률 4.6%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종영했습니다. 기안84는 본명 김희민으로, 본업은 웹툰 작가이지만 저와 같은 러너들 사이에서는 마라톤 마니아로 더욱 유명합니다. 뉴욕 마라톤, 프랑스 메독 마라톤 등을 완주하며 달리기에 진심인 면모를 꾸준히 보여왔습니다.
기안84가 마라톤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대단히 잘 달리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제가 이 예능을 보며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기안84의 고군분투였습니다. 남아프리카 트레일 마라톤을 완주하는 장면에서 저도 솔직히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컷오프 직전 6시간 38분, 토하고 쓰러지면서도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는 그 순간이 단순한 예능을 넘어선 진짜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컷오프란 마라톤 대회에서 설정된 제한 시간을 의미하며, 이 시간 안에 완주하지 못하면 실격 처리되어 공식 기록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저도 대회에 나가면 늘 컷오프를 의식하게 되는데, 그 압박감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달려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그 코스 자체도 가혹했습니다. 트레일 러닝이란 산길, 흙길, 자갈길 등 비포장 자연 지형을 달리는 러닝으로, 평탄한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는 로드 러닝보다 지면이 고르지 않아 발목과 무릎에 훨씬 큰 부담이 가해지고 체력 소모도 월등히 큽니다. 여기에 더해 야생동물이 출몰하는 길, 지옥 같은 급경사, 모래바닥 위를 7시간 안에 달려야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급경사에서 수없이 포기 유혹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달리는 기안84의 모습이 예능이 아닌 진짜 도전으로 느껴졌습니다.
진정성이 만든 도전
북극 마라톤을 앞두고 기안84가 노트북에 남긴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저 개인 스스로한테는 큰 도전"이라는 표현, 철분제를 먹고 인터벌 훈련을 하고 산을 뛰며 고민했다는 이야기에서 이 사람 진짜구나, 단순한 방송용 기획이 아니구나 라는 게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인터벌 훈련이란 고강도 달리기 구간과 저강도 회복 구간을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하는 훈련 방식으로, 짧은 시간 안에 심폐 지구력과 달리기 속도를 효과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어 마라톤 준비에 가장 많이 활용되는 훈련법 중 하나입니다. 저도 대회를 준비할 때 인터벌 훈련을 넣으면 확실히 달라진다는 걸 느끼는데,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훈련인지 알기에 그 대목에서 더욱 공감이 됐습니다. 힘들다고 알려진 훈련을 방송 준비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진정성의 증거였습니다.
기안84의 도전은 본인이 원해서 스스로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진정성 있는 도전이라는 점이 저의 심금을 가장 울렸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극한 환경의 마라톤을 예능 포맷으로 소비하는 방식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청자들에게 비현실적인 도전 욕구를 자극하거나 실제 위험성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기안84가 보여준 진정성은 그런 우려를 넘어서는 힘이 있었고, 저 역시 그 장면들을 보며 다음 마라톤 대회를 등록하고 싶어 졌습니다.
러닝으로 열어갈 새로운 도전
"마침표는 한번 찍을 필요가 있다"며 북극 마라톤을 준비하던 기안84는 결국 그 극한의 도전을 완주했습니다. 북극 마라톤이란 북극권의 눈과 얼음 위를 달리는 극지 마라톤으로, 영하 20~40도의 혹한 속에서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해야 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마라톤 대회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인 도심 마라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됩니다. 제 경험상 마라톤은 완주 그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더 큽니다. 처음 10km 대회에 나가 완주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기록보다 기억에 남은 건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을 붙잡았던 순간이었으니까요. 기안84가 북극의 혹한 속에서 무엇을 배웠을지, 그 장면을 보며 저도 함께 떠올리게 됐습니다.
러닝 크루장으로서 크루원들과 함께 성장하고, 실력자인 다른 출연진에게 배우는 걸 꺼리지 않는 모습은 단순한 예능인이 아닌 진짜 러너의 태도입니다. 러닝 크루란 함께 달리기를 즐기는 소모임으로,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훈련하며 서로 페이스를 맞추고 동기를 부여하는 달리기 커뮤니티를 말합니다. 혼자 달릴 때보다 훈련 완주율이 높아지고 부상 시 서로 조언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저도 크루에서 달리기 시작한 뒤로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을 거리를 완주하게 됐으니, 기안84가 크루를 통해 얼마나 성장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잘 달리는 사람의 완주보다 힘겹게 완주하는 사람의 모습이 더 많은 이들에게 동기를 준다는 사실, 이게 바로 기안84가 만든 러닝 열풍의 핵심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의 다음 도전이 또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떤 용기를 줄지 기대됩니다.
참고: https://www.entermedi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