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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라톤의 세 영웅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 이야기

by race 2026. 2. 14.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에서 오직 두 다리로 세계를 제패한 세 명의 마라토너가 있었습니다. 금메달의 영광 뒤에 숨겨진 나라 잃은 설움, 그리고 태극기를 달고 이룬 감격의 우승까지. 한국 마라톤 역사를 빛낸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한국 마라톤의 세 영웅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 (왼쪽부터)
왼쪽부터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의 모습이다. 자료 출처 : 국립체육진흥공단

 

 

손기정 -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고개를 숙인 사나이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달리기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집안이 몹시 가난했던 그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자갈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고 합니다. 소학교 시절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육상대회에서 청장년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일찌감치 마라톤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931년 조선신궁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육상 명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본격적으로 마라톤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각종 마라톤 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하며 국내 최고의 마라토너로 자리매김한 손기정은 1935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세계 정상급 실력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시상대에 오른 그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아닌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애국가 대신 일본 국가가 울려 퍼졌기 때문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게 된 손기정은 일본 측의 끊임없는 견제와 방해를 뚫고 마라톤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습니다. 42.195킬로미터를 2시간 29분 19초에 주파하며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이는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깨뜨린 대기록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그는 금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진 월계수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 채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우승의 기쁨보다 나라 잃은 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동아일보의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어졌고, 손기정은 일제의 감시 속에 사실상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를 자퇴하고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발에 무거운 추를 달고 달리기도 하고 일본 대표팀이 전부 잠들어 있을 때 새벽에 혼자 일어나 훈련을 강행하던 불굴의 마라토너는 일제의 탄압 앞에 선수로서의 삶을 내려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45년 광복이 찾아오자 그는 곧바로 마라톤으로 돌아왔습니다. 은행에 사표를 내고 조선마라톤보급회를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한 것입니다. 그가 발굴하고 키워낸 제자가 바로 서윤복이었습니다. 손기정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 감독으로 참가하여 제자 서윤복의 우승을 이끌어냈고, 이후에도 함기용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을 지도하는 등 한국 마라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서 전 세계인의 눈시울을 적셨으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혔습니다. 2002년 11월 타계한 손기정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12년간 세계 신기록을 보유했던 그의 위업은 단순한 스포츠 기록을 넘어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역사적 사건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손기정은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경기대회의 사인북에 한글로 자신의 이름을 적고 그 옆에 반드시 코리안이라고 써넣었는데, 이는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려 했던 그의 굳건한 민족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서윤복 - 태극기를 달고 보스톤의 하늘을 수놓은 젊은 영웅

1923년 경기도 고양군에서 태어난 서윤복은 손기정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마라톤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936년 아현화광소학교 5학년이던 열세 살의 서윤복은 교정에 떨어진 호외 신문을 통해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소식을 접했고, 그날부터 마라톤 선수의 꿈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경성상업실천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서윤복은 재학 시절부터 장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했지만, 처음부터 마라톤 전문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손기정이 조선마라톤보급회를 창설하고 젊은 인재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을 때, 12월 해방 기념 체육대회에서 장거리 선수로 뛰던 서윤복의 기량을 알아본 손기정은 그를 마라톤 선수로 키우기로 결심했습니다. 키 160센티미터에 체중 55킬로그램이라는 마라톤에 이상적인 체격 조건을 갖춘 데다 매일 전차를 따라 15킬로미터를 달릴 정도로 성실한 성품까지 겸비한 서윤복은 손기정의 집에서 숙식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1946년 제1회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 제1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 제2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하며 국내 최고의 마라토너로 급성장했습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출전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해방 직후의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십시일반 모금이 이루어졌고, 미군정청의 도움으로 군용기를 얻어 타는 등 우여곡절 끝에 손기정 감독, 남승룡 코치와 함께 미국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괌과 하와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치는 긴 여정 중에도 한국에서 가져간 쌀과 고추장, 김치 단지를 소중히 지키며 컨디션 조절에 만전을 기했다는 일화는 당시의 간절함을 잘 보여줍니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의 맑은 하늘 아래 서윤복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출발선에 섰습니다. 경기 후반부에는 관중의 개가 코스로 뛰어들어 넘어지면서 무릎과 팔꿈치에 상처를 입는 불운을 겪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렸습니다. 마지막 2킬로미터의 험준한 오르막길까지 질주한 끝에 2시간 25분 39초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동양인 최초로 보스턴 마라톤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이 기록은 손기정이 12년간 보유했던 세계 기록을 경신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세계 무대에서 태극기를 높이 올린 이 쾌거는 온 국민에게 벅찬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듬해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으나 컨디션 난조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1949년 깨끗이 은퇴한 뒤 숭문중고등학교 육상 감독과 서울시립운동장장 등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과 체육 행정에 헌신했습니다. 노년에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서윤복은 2017년 별세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 메달은 2021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023년에는 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1947 보스톤'이 개봉되어 많은 관객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남승룡 - 화분이 부러웠던 동메달리스트, 묵묵히 걸어간 헌신의 길

1912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남승룡은 외사촌 형 정종호가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여 시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 마라톤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순천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 전남 대표로 조선신궁대회 마라톤에 출전하여 입상하며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아사부상업중학교를 졸업한 뒤 메이지대학 정경과에서 학업과 마라톤을 병행했습니다. 남승룡의 실력은 일본 무대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1932년 전일본마라톤선수권과 1933년 극동선수권에서 잇달아 우승했으며, 일본건국기념 국제마라톤에서는 1934년과 1935년 연속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는 손기정을 제치고 1위로 골인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조선인 두 명이 마라톤 대표에 포함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어떻게든 한 명을 탈락시키려 했습니다. 올림픽 개최지인 베를린에 도착한 뒤에도 일본 선수들조차 반기지 않는 추가 선발전을 자체적으로 강행했지만, 남승룡은 손기정과 함께 다시 한번 1, 2위를 차지하며 실력으로 출전권을 지켜냈습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남승룡은 2시간 31분 42초의 기록으로 당당히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의 기록 차이는 불과 2분 남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상대에 오른 남승룡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에게는 기념품으로 월계수 화분이 주어져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지만, 동메달리스트인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남승룡은 손기정의 금메달이 부러웠던 것이 아니라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화분이 부러웠다고 회고했는데, 이 한마디는 나라 잃은 운동선수의 비통한 심정을 가장 절절하게 드러내는 명언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광복 이후 남승룡은 용산철도국 마라톤부 감독을 지내다가 평생의 동지인 손기정과 다시 의기투합하여 후진 양성에 나섰습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는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 겸 코치로 직접 경기에 참가했는데, 전성기가 한참 지난 3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시간 40분 10초의 기록으로 12위에 올라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베를린의 한을 풀어주는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남승룡은 전남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김연범, 김해룡, 송길윤 등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 헌신했고, 1956년에는 충무공정신계승 전국마라톤대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체육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를 역임하며 한국 육상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문화공로훈장과 1970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훈했습니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명성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남승룡에 대해 손기정 자신이 평생 같이 고생했는데 나만 대접받는 것 같아서 언제나 미안하고 큰 빚을 진 기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두 사람의 우정과 동지애는 깊었습니다. 2001년 세상을 떠난 남승룡은 2023년 대한체육회의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되며 뒤늦게나마 마땅한 예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순천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남승룡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매년 남승룡 마라톤 대회가 열려 그의 숭고한 스포츠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