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녁 시간 서울 도심을 걷다 보면,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리듬감 있게 달려가는 무리를 꽤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바로 러닝크루인데요. 오늘은 단순히 운동을 넘어 하나의 문화이자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은 서울의 러닝크루 세 팀인 88서울(EES), 노룰스러닝, 와우산30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88서울(EES) - 서울 스트릿 러닝 문화의 원조
서울의 러닝크루 이야기를 하면서 88서울을 빼놓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2015년에 탄생한 이 크루는 도심에서 자유롭게 뛰는 이른바 '시티런' 문화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곳이에요. 88서울이라는 이름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출발했는데요, 그 시절 온 도시가 스포츠로 뜨거웠던 에너지를 러닝이라는 방식으로 다시 이어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88서울의 슬로건은 꽤 인상적입니다. "Seoul, All roads are our tracks." 서울의 모든 길이 곧 우리의 트랙이라는 선언인데요, 이 한 문장이 88서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들은 한강 둔치나 공원 같은 전형적인 러닝 코스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시청에서 광화문을 지나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도심 한복판을 달리기도 하고, DDP 주변의 야경을 배경으로 뛰기도 하죠.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풍경을 두 발로 직접 느끼는 러닝, 그게 88서울이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정기 러닝 세션은 매주 목요일 저녁 8시에 열립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쉬는 법이 없어요. 이게 벌써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에요. 매주 다양한 곳을 돌아가며 시티런을 진행하기 때문에, 같은 서울이라도 매번 다른 풍경 속을 달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EES라는 이름으로 리브랜딩을 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고요, 자체적으로 TFF(The Fast & Furious)라는 오리지널 토너먼트 레이스를 만들어 기존의 러닝 세션이나 마라톤 대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쟁 문화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88서울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러닝 그 자체에 굉장히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러닝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기 때문에, 음주를 포함한 뒤풀이나 사교 목적의 활동은 지양하는 편이에요. 겉에서 보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 멤버가 되면 그 안에서의 유대감은 상당하다고 해요. 가입 방식도 독특한데요, 정회원이 되려면 먼저 게스트 러너로 참여해야 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공식 인스타그램(@eightyeightseoul)을 통해 게스트 신청 공지가 올라오고, 이를 통해 신청하면 목요일 정규 세션에 함께 달릴 수 있어요. 이렇게 꾸준히 게스트로 참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멤버로 합류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자체 의류 라인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네 개의 원으로 구성된 로고와 제24회 서울 올림픽에서 모티프를 따온 디자인이 특징인데, 멤버들은 정규 세션은 물론이고 대회나 대외 활동에서도 항상 AWE를 착용합니다. 단순히 크루 굿즈 수준을 넘어서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입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죠. 나이키, 아식스, 예일 같은 브랜드와의 협업도 활발하게 이어오고 있고요. 88서울은 어떤 브랜드의 힘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자기들만의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 크루입니다. 그래서인지 서울 스트릿 러닝 문화의 '오리진'이라는 타이틀이 이 크루에게는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정말로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룰스러닝(No Rules Running) - 우리 달리기엔 규칙이 없어
두 번째로 소개할 크루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노룰스러닝, 영어로 No Rules Running. "우리 달리기엔 규칙이 없어"라는 선언을 크루명 자체에 담아버린 곳이에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 크루는 러닝에 형식이나 틀을 씌우지 않겠다는 철학을 가장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어떤 페이스로 뛰어야 한다거나, 어떤 코스를 따라야 한다거나 하는 정해진 룰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달리는 것 자체가 이 크루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노룰스러닝의 가장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No Rules Tuesday'입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 서울 도심 곳곳에서 정기 러닝 세션이 열리는데요, 이름 그대로 정해진 규칙 없이 숨겨진 도심의 길을 자유롭게 누비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주로 한남동, 성수동, 압구정 로데오, 가로수길 같은 서울에서도 감도 높은 동네들을 달리는데, 매번 같은 코스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 나가는 게 특징이에요. 어느 날은 한남동의 조용한 뒷골목을 누비다가, 또 어느 날은 성수동의 카페거리를 지나 서울숲 방향으로 달리기도 하죠. 정해진 코스가 없다는 건 곧 매주 새로운 풍경을 만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화요일의 No Rules Tuesday가 자유로운 소셜 러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목요일에는 'TEAM VOLO'라는 이름의 트레이닝 세션이 별도로 진행됩니다. VOLO는 라틴어로 '나는 원한다'라는 뜻인데요, "Volo, Ergo Sum", 즉 "나는 원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철학이 담겨 있어요. 단순히 편하게 뛰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고 싶은 러너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됩니다. 같은 크루 안에서도 가볍게 뛰고 싶은 날과 진지하게 훈련하고 싶은 날을 구분해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꽤 매력적이에요. 주말에도 노룰스러닝의 활동은 이어집니다. 'Weekend Social Run'이라는 이름으로 주말마다 소셜 러닝이 진행되는데, 평일에는 시간이 맞지 않는 분들이나 좀 더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함께 달리고 싶은 분들이 참여하기에 좋아요. 이렇게 화요일, 목요일, 주말까지 주 3회 이상의 러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보니, 본인의 일정과 컨디션에 맞춰 유연하게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 있습니다. 노룰스러닝은 멤버 구성원들끼리 라이프스타일을 서로 공유하고 같이 즐기는 분위기라서 멤버들 사이의 유대감이 상당히 깊은 편이에요. 가족 같은 관계라는 표현을 쓰는 멤버도 있을 정도인데, 그러면서도 모임의 궁극적인 목적인 러닝만큼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해요. 사교를 위한 러닝이 아니라, 러닝을 중심에 두고 그 위에 자연스럽게 관계가 쌓이는 방식인 거죠. 인스타그램(@norulesrunning)을 통해 모든 활동이 공지되고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재 팔로워가 1만 6천 명을 넘을 정도로 서울 러닝 씬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자체 온라인 숍도 운영하면서 크루 굿즈를 판매하고 있고, 해외 러닝 투어 프로그램도 기획하는 등 단순한 동호회를 넘어선 하나의 러닝 브랜드로 성장해 나가고 있어요. 'No Rules'라는 이름이 자칫 아무렇게나 뛴다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형식과 틀에 갇히지 않고 러닝 본연의 즐거움을 지키겠다는 꽤 단단한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는 크루입니다. 규칙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이 크루의 가장 강력한 규칙인 셈이에요.
와우산30 - 홍대 문화의 축소판을 달리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크루는 와우산30입니다. 이름이 독특하죠. 이 이름에는 사실 아주 직관적인 이유가 숨어 있어요. 2014년 11월, 홍대 인근에 직장을 둔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당시 멤버들이 다니던 회사의 주소가 바로 마포구 와우산로 30길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주소를 그대로 크루 이름으로 가져왔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2013년 11월 23일에 처음으로 크루 로고를 달고 손기정평화마라톤을 뛰었고, 그날을 공식적인 시작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해요. 당시 멤버 중 상당수가 광고 기획자였고, 클라이언트 중에 나이키가 있었기 때문에 한창 태동하던 러닝 문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함께 뛰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이미 꽤 유명합니다. 와우산30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홍대 지역을 기반으로 합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에 와우산로 30길 18에 모여서 홍대 일대의 거리를 달리는데요, 보통 한 세션에 3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요. 홍대라는 지역 자체가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곳이다 보니, 크루의 문화적 성격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 아티스트, 타투이스트, 디자이너, 광고 기획자 등 개성이 강하고 독특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와우산30을 '홍대 문화의 축소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예요. 처음에는 마포구 홍대 인근만 뛰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도심을 달릴 때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인원도 늘어나면서 러닝 코스를 서울 곳곳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경의선 숲길공원을 지나 홍제천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달리면 도심의 소음이 점점 잦아들면서 마치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낀 듯 고요해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해요. 가을이면 용산기찻길이 하이라이트 코스로 꼽히는데, 노들섬 둘레길 뒤로 보이는 한강철교와 63빌딩의 풍경까지 담을 수 있어서 마치 서울 전체를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와우산30이 결성 10주년을 맞이했을 때 진행한 'WA-TO-WA' 프로젝트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대장정이에요. 서울의 와우산에서 부산 해운대의 와우산까지, 총 432.8km 거리를 멤버 35명이 3일 동안 릴레이 형식으로 달린 겁니다. 58시간이 넘게 이어진 이 여정은 단순한 러닝을 넘어서 공동체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프로젝트였다고 해요. 크루원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구간을 책임지고 바통을 넘기면서, 혼자서는 절대 완주할 수 없는 거리를 함께이기에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많은 감동을 줬다고 합니다. 와우산30에 합류하고 싶다면 조금의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정규 러닝 세션에 최소 10번 이상 참석해야 정식 멤버로 인정받을 수 있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정규 세션 기준으로 보면 약 2개월 반 정도를 꾸준히 나와야 하는 셈인데, 크루 측에서는 이 과정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와우산30에 동화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참여 방법은 매주 일요일 저녁에 인스타그램(@wausan30)에 올라오는 공지에 댓글을 다는 것으로, 선착순 20명까지 참여할 수 있어요. 러닝 크루 특유의 굿즈 문화도 와우산30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데요, 크루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비롯해 헤드밴드, 반바지, 러닝용 가방, 물통, 수건 등 다양한 아이템을 자체 제작합니다. 예전에는 형광색 러닝복이 주류였다면, 요즘은 소속 크루의 굿즈를 착용하는 게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와우산30은 나이키, 예일 같은 브랜드와도 활발하게 협업해 왔습니다. 특히 예일과 함께한 '러닝 챔피온십'은 '코피티션(Co-petition)'이라는 슬로건 아래 협력과 경쟁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러닝을 통해 전달하고자 기획된 행사였어요. 크루 멤버들 사이의 유대감도 상당합니다. 다이어트나 마라톤 완주 같은 특정 목표보다는 함께 달리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인데요, 수평적이고 압박 없는 문화 덕분에 다양한 연령대의 멤버들이 편하게 어울리고 있습니다. 크루 내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 중 하나가 "오래 사귄 동네 친구보다 러닝 크루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유대감이 더 강하다"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아마 함께 숨을 헐떡이며 같은 골목을 달려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